
온다 리쿠의 《스프링》을 읽었다.
원래는 지난 짧은 연휴 때 읽으려했지만, 미루고 미루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다 읽을 수 있었다.
아 그리고 서평은 최대한 내가 느낀 점만 적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작가가 누구인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등등은 굳이 적고 싶지 않다.
그런건 좀만 찾아보면 나오는 거니까.
그리고 책 내용도 가급적이면 피하려고 한다.
몇몇 부분은 언급할 수 있지만, 그래도 스포일러는 피하고 싶다.
그래서 정말 순수하게 책을 읽으며 남은 감상을 위주로만 적을 것이다.
#0.
이걸로 온다 리쿠의 책은 두 번째로 읽어본다.
처음 읽었던 책은 《꿀벌의 천둥》이었다.
《스프링》은 발레 무용수에 대한 이야기라면, 《꿀벌의 천둥》은 클래식 피아노 콩쿨 대회에 대한 이야기였다.
온다 리쿠의 두 권의 책을 읽었을 때 마치 수채화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보통 소설을 읽을 때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상상하며 읽는다.
그런데 유독 온다 리쿠의 책은 마치 수채화처럼 그려진다.
물을 한껏 머금은 색채가 도화지에 번져나간다.
정말, '번져'간다.
인물들의 감성과 행동, 《꿀벌의 천둥》에서는 눈앞에서 피아노의 소리가, 《스프링》에서는 무용수들의 몸짓과 손짓이 하나하나 번져간다.
그걸 읽는 나도 물들어간다.
그리고 그 '번짐'은 인상적으로 남는다.
《꿀벌의 천둥》은 오래 전에 읽은 탓에 별로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남아있는 하나의 인상이 있다.
콩쿨 무대 위에서 피아노가 연주되고, 수많은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이 지켜보고 있다.
분명 실내 무대인데, 피아노 선율을 따라 드넓은 잔디밭이 나타난다.
관중들도 마치 잔디가 되어 저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눕힌다.
내게는 이런 이미지 하나만이 남아있다.
그런 의미에서 《꿀벌의 천둥》은 상당히 인상적이고 충격적이었다.
과연 소리로 들리는 피아노 연주에 대한 인상을 글로 표현한다는게 가능할까?
우리는 한번씩 클리셰처럼 클래식 공연을 보고 감동받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걸 볼 때마다 쉽게 공감되지는 않는다.
심지어 같은 자리에서 보아도 별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에서 소리를 듣고서도 그러는데, 과연 글로 그러한 감정을 전달하는게 가능할까 싶었었다.
그리고 온다 리쿠는 성공적으로 그려낸다.
어쩌면 그녀의 문체가 '번지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독자로 하여금 감정을 '번지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꿀벌의 천둥》은 정말 추천하는 책이다.
혹시나 책을 별로 안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소설의 저력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책인 것 같다.
정말, 여러모로 대단한 책이다.
#1.
《스프링》은 읽기 전에 두려움이 약간 앞섰다.
《스프링》이 발레 무용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은 이전에 알았지만, 나는 완전히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꿀벌의 천둥》를 읽을 때 클래식 피아노에 대해 일가견에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씩은 클래식 음악을 들었었다.
그에 비해 무용은 본 적도 없었고, 발레는 더더욱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책을 펼칠 때 약간의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뭐, 소설이라는게 원래 전문서적이랑은 다른 거니까.
《스프링》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스프링》의 가장 주된 주인공인 '요로즈 하루'를 중심으로, 1~3장은 주변 인물의 시점에서 본 '요로즈 하루'를 그리고, 마지막 4장은 '요로즈 하루'가 본인의 시점에서 그려지게 된다.
그래서 이 4개의 장을 통해 '요로즈 하루'의 과거부터 시작해, 성장해 나가고, 성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각 장마다 주요한 테마가 있다고 느껴졌다.
1장은 바로 '세계를 보는 눈'이었다.
1장의 화자인 '후카쓰 준'은 '요로즈 하루'의 발레 동료이자 라이벌이자 친구이다.
둘은 발레 워크숍에서 처음 만나지만, 이후 같이 발레 학교로 진학하면서 함께 하게 된다.
'후카쓰 준'은 무대에서 자신이 보여지는 것을 즐긴다.
시선을 받는 것도 좋다. 내가 시선을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 던져지는 시선 속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나를 둘러싼 세계가 반전되고, 나의 내장이 휙 뒤집혀 세상을 감싸는 듯한 감각에 잠기는 순간이 좋다.
그럴 때 나는 행복을 느낀다.
p. 38
하지만 '요로즈 하루'는 굳이 나누자면 '보는' 쪽에 해당한다.
정확하게는 세계를 보는 쪽이다.
'후카쓰 준'은 세계에 보여지는 쪽이라면, '요로즈 하루'는 보는 쪽이다.
'요로즈 하루'는 자신이 직접 세계를 보고, 그걸 발레 무용으로 그려낸다.
이러한 대비가 가장 잘 나타나는게 <겨울 나무>였다고 생각한다.
'후카쓰 준'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보여지지만, '요로즈 하루'는 자신이 본 바람과 떨어지는 낙엽을 온몸으로 표현한다.
아래는 그 외에 몇 가지 인상적인, 혹은 내 마음을 '번지게'한 구절들이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기껏해야 백 개의 봄밖에 찾아오지 않는데, 녀석은 이름에 만 개의 봄을 지니고 있다.
p. 10
그 모습이 눈에 확 들러온 건 어째서인지 주변보다 색이 짙게 보였기 때문이다.
p. 13
좋아하는 것이나 아름다운 것에는 늘 상실의 예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p. 108
환한 빛에 눈을 가늘게 뜨면서 나는 녀석이 무엇을 보소 있었는지, 무엇을 보려고 했는지 아주 조금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p. 119
개인적으로 4개의 장 중에서 1장이 가장 좋았다.
어떻게 보면 나도 '요로즈 하루'라는 인물을 처음 만나는 곳이어서 그런건가?
정말로 이 인물이 '번져나가는' 걸 전적으로 즐길 수 있었다.
#2.
2장은 외삼촌 '미노루'의 입장에서 좀 더 어린 시절의 '요로즈 하루'을 보여준다.
내가 느낀 2장의 테마는 '향기'인 것 같았다.
2장 곳곳에서 '요로즈 하루'의 향기가 느껴진다.
그와 함께 합을 맞춘 파트너는 '요로즈 하루'한테서 장미향을 맡고, '미노루 삼촌' 앞에서 매화나무를 표현할 때는 매화향을 남긴다.
마치 아무리 숨기려 향기는 숨겨지지 않는 것처럼...
어린 시절부터 '요로즈 하루'의 향기는 숨겨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길 가다 갑자기 발레를 배워보지 않겠냐고 캐스팅되는 것이 아닐까?
가부키든 발레든, 형식이 있는 예술의 힘을 뼈저리게 느낀다.
몸에 주입되고 스며든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롭게 춤출 수 있는 것이다.
p. 167
봄은 만남과 이별의 계절.
p.216
#3.
3장은 같이 일본에서부터 발레를 함께 시작했지만, 작곡가로 진로를 바꾼 '나나세'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이때 '요로즈 하루'는 이미 무용수로써, 그리고 안무 창작가로써 성공 가도에 들어선 시기였다.
'나나세'는 '요로즈 하루'의 뮤즈가 된다.
'나나세'가 곡을 써 주고, '요로즈 하루'는 발레를 한다.
둘은 수많은 협업을 통해 서로 성장하고, 또 성공하게 된다.
내가 3장에서 느낀 점은 앞선 두 장과 달리, 작가 개인의 생각이 많이 들어간 부분이 아닐까 싶다.
굳이 테마를 정하자면 '창작자' 혹은 '창작자의 고뇌'일까.
아무래도 '나나세'가 작곡가인만큼 그런 것이 아닐까?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는 건 온갖 분야에서 통용되는 진리다.
p. 295
하루, 나를 두고 가지 마.
p. 322
두 구절 모두 '나나세'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요로즈 하루'를 보며 하는 생각이다.
'변하지 않으려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
즉, 본인의 오리지널리티를 유지하려면 매번 조금씩 조금씩 변형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금만 익숙해지면, 자기 복제에 빠져버리고, 그걸 보는 사람들에게도 뻔한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은 작가 온다 리쿠가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이미 《꿀벌의 천둥》로 일본 문학 역사상 최초로 나오키상과 문학 대상을 수상한 자신에게 보내는 경고의 메세지 같았다.
그런 점에서 《스프링》은 훌륭한 변형이었던 것 같다.
다른 소재, 다른 내용, 다른 인물, 다른 성격, 다른 상황으로 글을 썼지만, 그녀의 문체는 여전히 남아있다.
마치 수채화처럼 번지는 문체가.
세상을 발레로 연주하는 남자, 요로즈 하루
p. 262
전율케 하라.
p. 344
#4.
4장은 '요로즈 하루'가 본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간다.
음... 개인적으로는 조금 아쉬웠다.
앞선 3장까지는 주변 인물이 본 '요로즈 하루'에 대한 글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본 훌륭한 사람, '요로즈 하루'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4장은 본인이 본인의 이야기를 한다.
1장에서 '후카쓰 준'이 어렴풋하게만 볼 수 있었던 '요로즈 하루'가 바라본 세계를, 4장에서는 본인이 직접 설명해준다.
마치 나의 이상적인 롤모델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런 롤모델에 하나의 작은 금이 간 것처럼 보였다.
어떻게 보면 4장은 '요로즈 하루'가 인간으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인 것도 같았다.
그리고 4장의 테마가 '사랑'인 것도 한 몫하는 것 같다.
4장에는 '요로즈 하루'가 사랑한 사람들이 나온다.
그리고 가장 사랑하는 '발레의 신'. (여기서 '발레의 신'은 어떤 사람의 칭호가 아니라 진짜 신을 의미한다.)
그런 사랑의 과정을 통해서 인간으로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요컨데 장은 처음부터 내가 이 세상의 형태를 추구하기 위해 발레를 한다는 것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p. 366
탁월한 음악가 혹은 무용수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점은 하나의 음, 하나의 동작에 담긴 압도적인 정보량이다. 그들의 소리와 동작에는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 예술가가 품고 있는 철학과 우주가 응축되어 있다.
p. 372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무대에서 살아갈 수 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마음껏 감정을 토해낼 수 있거든.”
p. 380
봄은 죽음의 계절.
p. 394
나이를 먹고 노년에 들어서면 해마다 봄이 두려워진다. 올해도 겨울을 극복했다는 기쁨보다, 살아남아 봄을 맞이한다는 배겨내기 힘든 심정이 더 커진다. 봄의 뻔뻔스러운 밝음에, 싹트는 생명의 흉포함에 주눅이 들게 된다.
p. 395
춤은 기도를 닮았다.
<봄의 제전>을 만드는 동안 그런 생각을 마음속 어딘가에서 계속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기도하는지는 모른다. 내가 나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내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기도하는 것인지, 춤추는 행위가 기도인지, 기도하는 행위가 춤으로 나타나는 것인지. 그 부분은 혼돈에 차 있어서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p. 437
나는 세계를 전율케 하고 있는가?
그건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아직 만나지 못한 수많은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앞으로도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어떤 형태로든 계속 춤출 것이다.
불안은 없다.
나는 이 이름에 만 개의 봄을 품고 있으니까.
p. 458
아 그리고 한 가지.
4장에는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다.
3장까지는 인물의 대사가 구분이 안 되어 있다.
그래서 한 번씩 이게 인물의 대사인지, 아니면 그 시점의 인물의 속마음인건지 구분이 안될 때가 있었다.
하지만 4장에는 큰따옴표("")로 대사가 구분이 되어 있었다.
당연히 이런 차이를 일부로 둔 것 같은데 왜 그런걸까?
#5.
다시 한 번, 온다 리쿠의 글은 도화지에 그려지는 수채화같다.
한껏 물을 머금은 색채가 새하얀 도화지 위에서 번져 나간다.
하지만 수채화도 이내 시간이 지나면 마른다.
서평을 쓰는 지금도 이미 다 말라버린 것 같다.
분명 글을 읽을 때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이 번져 나갔던 것 같다.
문장 하나하나마다 상상되는 그림, 음악, 행동 모든게 달랐다.
예를 들어 4장에서 '요로즈 하루'가 자신의 이름에 들어간 '봄'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귓가에서 새소년의 <난춘>이라는 곡이 아른거렸다.
지금은 《스프링》이 그려낸 수많은 수채화 그림들이 기억에 남아있다.
하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만 남겠지.
《꿀벌의 천둥》이 잔디밭이 펼쳐진 클래식 피아노 콩쿨로 남아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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